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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산업

석유이야기

1) 석유와의 만남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조선 후기의 학자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타난 기록들을 보면 대략 1880년경으로 추측된다. 『매천야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석유는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서양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바닷속에서 난다고도 하고, 혹은 석탄에서 만든다고도 하고, 혹은 돌을 삶아서 그 물을 받은 것이라고 하여 그 설이 다르다. ∙∙∙(중략)∙∙∙ 우리나라에서 석유는 경진년인 1880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그 색깔이 불그스레하고 냄새가 심했으나, 한 홉이면 열흘을 밝힐 수 있었다. 몇 년 후 그 색깔이 희어지고 냄새도 덜 났지만, 화력이 떨어져 한 홉으로 3,4일 밤을 밝힐 수 있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고종 17년인 1880년(경진년)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역시 1880년 승려 이동인이 개화파 인사들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큰 도시를 다니며 신식문명을 견학하다가 석유와 석유램프, 성냥을 들여와 사용했다고도 전하고 있다. 개화기 조선의 미국 공사 알렌이 지은 『Korea Fact & Fancy』의 연표에 따르면 1898년 서울 시가지에 석유등이 점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석유등에 의한 최초의 가로조명으로 생각된다.

개화로 말미암아 석유문명의 혜택을 받기 시작했지만 서구 열강들의 시장 지배도 시작되었다. 1897년 알렌은 우리 조정으로부터 이권을 무더기로 따냈다. 이를 통해 당시 미국의 최대 석유회사이던 스탠다드 오일의 석유가 당시로써는 국내 유일의 석유였고 이것을 ‘솔표’라는 상표를 붙여 판매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인천 월미도에 석유저장소 건립허가를 받아냈고, 그해 말에 조선 최초의 석유저장탱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월미도엔 ‘남산만한 서양 기름통’과 ‘서양 기름선’을 구경하기 위해 인파가 밀려들었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 미국산 석유만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1902년까지는 미국 석유 외에 일본 석유와 러시아 석유가 판매경쟁을 벌이지만, 미국 석유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와중에 일본 상인들이 질이 떨어지는 일본 석유에다 미국 석유를 몰래 섞어서 판매하는 상표도용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스탠다드 오일이 독점하던 석유시장은 1920년 이후 미국의 텍사코와 영국의 쉘이 들어오면서 치열한 3파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30년대에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미국, 영국 등과 마찰을 빚게 되자 석유공급에 이상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4년 일본은 산업물자의 통제와 함께 석유도 6개월분을 미리 보유•비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석유업령’을 공포하였다. 또한 대륙침략의 발판기지로 한반도를 병참 기지화한 일본은 1935년 조선석유를 설립하고 연산 30만 톤(하루 약 6천 배럴) 규모의 원산정유공장을 건설했다. 1938년 원산공장이 완공된 후 조선석유는 미국에서 전용 유조선으로 원유를 운송하여 정제했다. 그러나 일본이 석유를 국책화하면서 육군의 강력한 지원으로 급속히 육성시키려는 기미를 보이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공급을 제한하였고, 마지막에는 석유수출을 금지하자 일본은 석유수급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재빨리 수마트라, 자바 등을 점령하고 남방석유자원을 확보했지만 모든 선박이 해군용으로 징발되어 남방석유를 실어오는데 필요한 선박 부족문제에 봉착하였다. 더구나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미군 비행기의 폭격이 잦아져서 석유수송이 더욱 어려워지자 원산정유공장은 결국 가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미군은 군정청 산하에 석유제품의 수입 및 배급 기능을 담당하는 석유배급 대행회사(PDA : Petroleum Distribution Agency)를 설립하였고, 국내 석유제품 공급은 이 대행회사를 통해 시행되었다. 또한 조선석유도 미군정의 관리를 받게 되었으며, 1949년에는 모든 석유류의 저장과 판매 업무를 주관하는 대한석유저장주식회사(KOSCO, Korea Oil Storage Co.)가 설립되었다. KOSCO는 6.25 전쟁의 발발로 스탠다드 오일, 칼텍스, 쉘의 석유류 판매회사가 철수함에 따라 석유제품의 직접 판매를 전담하게 되었다. 1955년 5월 정부는 점차 늘어나는 석유류 수요에 대비하여 한미 석유운영협정을 체결하여 석유제품의 취급, 저장 및 관리를 규정하게 되었다. 이 협정은 한국, 미국 및 대한석유저장회사의 3자 협정으로 한국이 도입하는 석유류 제품의 외화조달을 미국정부가 보장하고, 3대 메이저에 의해 구성되었던 대한석유저장회사가 석유제품의 인수, 저장, 배급을 담당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964년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가 그 시설과 업무를 인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 석유산업의 발전사

국내 정유산업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출범과 함께 시작하였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의 혼란을 겪고 난 이후 점차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안정되자 정부는 경제자립과 국민생활 향상을 위하여 경제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첫 단계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주요 목표로는 첫째, 자립경제체제의 확립과 공업생산기반의 확충, 둘째, 생산시설의 근대화, 셋째,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지원, 넷째, 고도성장기반으로서의 수출산업 개발 육성, 다섯째, 중소기업 지원의 다각화 등을 설정했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을 설정함에 따라 정부는 무엇보다도 석유에너지의 안정적 공급 없이는 이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국가경제의 기간산업으로 또한 수입대체산업의 핵심사업으로 정유공장 건설을 최우선사업으로 채택하였다. 경제성장을 위한 공업화 과정에서는 그에 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 공급은 필수불가결한 요건일 뿐 아니라, 에너지 수급구조 개편으로 석탄을 대신할 석유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 석유류 공급은 외국법인인 대한석유저장회사(KOSCO)에 독점되어 있었고, 더구나 AID원조자금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비싼 석유류 완제품만을 수입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원유를 수입, 가공할 수 있는 정유공장의 건설은 외화 절약뿐만 아니라 종래의 통제배급에 따른 소비억제정책을 지양하고 공업화를 위한 안정적 에너지공급체제로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64년 4월 1일 일산 3만 5천 배럴 규모의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 울산 정유공장이 국내 최초로 가동을 시작하였다. 울산 정유공장의 가동으로 석유의 국내 안정공급이 가능해짐에 따라 산업생산은 물론 국민생활측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의 주종 에너지원은 석탄이었다. 그러나 울산 정유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이후 석유가 경제개발을 위한 산업 동력원으로서 본격 공급되기 시작하자 총에너지 소비에서 석유의 점유율이 급격히 높아져갔다. 1962년에 9.8%에 불과했던 석유 점유율은 1971년에는 50.6%를 차지하여 국내 에너지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1978년에 최고 63.3%까지 기록하였던 석유점유율은 이후 차츰 낮아져 2018년 기준 38.4%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석유는 현재까지 주종 에너지원으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과 자동차 보급 확대 등에 따라 수송용 및 석유화학 원료용으로 소비되는 석유 소비 규모는 계속 늘고 있지만, 산업 및 발전부문에서 LNG와 원자력으로의 수요 전환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정제능력 추이를 보면, 1964년 SK에너지 전신인 유공의 일산 35천 배럴로 시작된 국내 정제능력은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됨에 따라서 유공의 설비증설과 호남정유공장 준공으로 1969년 18만 B/D로 늘어났다. 1973년 1차와 2차 석유위기가 있었던 1970년대에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따라서 원유 정제설비 증설이 이루어져 1980년까지 64만B/D를 기록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기까지 경제성장에 따른 석유수요 증가에 맞추어 대규모 정제설비 증설이 이루어져서 1996년에 국내 총 정제능력은 2,438만B/D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정부에 허가를 받은 정제능력과 실제 공장설계 정제능력 사이에 차이가 있어서 100% 이상의 가동률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2004년에서야 허가규모와 실제규모 상의 차이를 현실화하였다. 2000년대 초 이후 고유가 추세가 지속되면서 정유회사들은 대부분 중질유의 2차 정제시설인 고도화 정제설비 투자에 나서며 정제능력을 확장하였다. 그 결과2018년 말 현재 국내 총 정제능력은 3,204천B/D를 기록하였다.





3) 정유회사의 발전



SK에너지는 1962년에 설립된 국내 최초, 최대 정유회사이다. 정부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최우선과제로 정유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대한석유공사법」을 제정, 같은 해 10월 대한석유공사를 설립하였다. 대한석유공사는 미국 걸프사와 자금 및 원유공급계약 등을 골자로 한 계약을 성사시켜 1963년 12월, 울산에 정유공장을 준공하였다. 이후 1960년대 후반 국내 석유화학 제품의 수요 급증으로 시설확장 및 석유화학사업 진출을 위한 투자자금을 미국계 메이저석유회사 걸프(Gulf)의 지분 확대를 통해 조달함으로써 1970년에 회사경영권이 정부에서 걸프(Gulf)에 넘어갔다. 그러나 걸프(Gulf)는 1•2차 석유위기로 원유공급능력 악화 등 경영여건이 악화되자 대한석유공사 주식 50%를 우리 정부에 인도하고 1980년 8월 우리나라에서 전면 철수하였다. 이에 정부는 국제 석유정세에 신속한 대처와 건실한 경영을 위하여 대한석유공사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하고 주식회사 선경을 대상자로 선정하였다. 선경은 1982년 대한석유공사의 사명을 ㈜유공으로 변경했으며, 1997년에 SK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2007년 7월에 지주회사(SK주식회사)와 사업회사(SK에너지)로 분할하였고, 2008년 2월에는 자회사인 SK인천정유(1970년 설립된 경인에너지가 전신)와 합병을 완료하였다. SK에너지는 이후에 전문분야 사업에 대하여 분사를 시행하여 현재는 SK이노베이션(중간지주회사), SK에너지(석유산업), SK종합화학(화학사업), SK루브리컨츠(윤활유사업), SK인천석유화학(석유•화학사업),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트레이딩사업), SK아이이테크놀로지(소재사업)로 체계를 이루고 있다.







GS칼텍스는 1967년 대한민국 최초로 설립된 민간 정유회사이다.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이어 제2차 계획을 공업화에 초점을 맞추어 추진하였으며, 공업화에 필수적인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66년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를 공모 하였다. 일찍부터 정유사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던 럭키는 국내 시장에 관심이 많던 미국 칼텍스사와 손잡고 공모에 응해 최종 사업자로 선정되었으며 이듬해 호남정유를 설립하였다. 설립 초기 합작사의 이점을 살려 공장 및 저유소 건설과 수송•판매망 구축, 원유 공급, 선진경영제도 도입 등 성장토대를 구축한 GS칼텍스는 1986년부터 한국측 단독경영체제를 출범하여 안정적인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GS칼텍스는 1969년 여수제1공장과 인천윤활유공장을 준공한 이래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석유, 석유화학, 윤활유 등 중화학공업을 선도하며 반세기 동안 국가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 왔다. 1981년 국내 정유업계 최초로 임가공 수출을 시작해 1983년 국내 정유사 최초로 2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였다. 2008년 150억불, 2011년 200억불 수출 달성에 이어 2012년에는 정유업계 최초이자 국내 기업 가운데 두 번째로 250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였다. 1996년 LG칼텍스정유로 사명을 변경하였으며 2005년 3월 LG그룹으로부터 분리되어 GS칼텍스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GS칼텍스는 정유 및 석유화학 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노력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에쓰-오일의 전신은 1976년, 쌍용그룹과 이란국영석유공사(NIOC) 간의 합작투자로 설립된 한이석유였다. 1980년 이란의 회교혁명으로 인해 NIOC가 철수하면서 이란 측 소유주식을 쌍용그룹이 전량 인수하고 쌍용정유로 상호를 변경했다. 1991년, 사우디 국영석유회사이자 세계최대의 석유기업인 사우디 아람코(Saudi Aramco)가 35%의 지분을 취득하여 당시 28.4%의 지분을 보유한 쌍용그룹과 공동경영을 시작했다. 이후 1990년대 중반 선제적으로 중질유 분해 시설을 완공하고 PX공장을 건설하는 등 대규모 투자와 함께 경쟁력과 수익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1999년 쌍용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28.4%의 지분을 자사주로 매입하고 계열분리를 하면서 이듬해인 2000년, 사명을 현재의 에쓰-오일(S-OIL)로 변경하였다. 2007년 에쓰-오일이 자사주로 보유하고 있던 28.4%의 지분을 한진그룹이 매입하고 사우디 아람코와 공동경영에 참여했으나, 2015년 사우디 아람코가 한진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전량을 매입하면서 63.4%를 보유한 최대주주로서 단독경영하고 있다. 2018년 잔사유 고도화 시설 및 올레핀 다운스트림 프로젝트를 완공하며 석유화학 다운스트림 사업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경쟁력 있고 존경받는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극동석유공업㈜는 고급윤활유를 주로 공급해온 회사로서 일대 도약을 모색하기 위해 세계적인 메이저인 로열더치쉘과 합작투자 및 차관공여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1969년 상호를 국동쉘석유㈜로 변경했다. 극동쉘석유는 1977년에 극동석유주식회사로 상호 변경하고, 쉘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합작계약이 해지되자 쉘의 지분 50%를 현대가 매입하였다. 1988년 상호를 다시 극동정유주식회사로 변경한 후 1989년에 대산 등지에 정유공장을 준공하였고 현대그룹이 1993년에 극동정유를 인수하게 됨으로써 현대정유주식회사가 탄생하였다. 2002년 사명을 현대정유에서 현대오일뱅크로 변경하였으며 2010년 현대중공업그룹 계열로 편입되었다. 현대오일뱅크는 지속적인 신사업 발굴과 합작 사업을 통한 공장 개선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6년 대산공장에 하루 20만 배럴 규모의 원유정제 설비를 증설하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2019년 국내 업계 최초로 고도화율 40.6%를 기록하였다. 현대오일뱅크는 일본 코스모석유와 합작하여 현대코스모를 설립하고 석유화학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였으며 롯데케미칼과 국내 최초 정유사-석유화학사 합작법인인 현대케미칼을 설립하여 콘덴세이트 정제 및 MX 제조를 시작하였다. 또한 쉘과 합작하여 현대쉘베이스오일을 설립하고 친환경 윤활기유를 생산•판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오일터미널을 설립하여 국내 정유회사 최초로 상업용 탱크터미널 사업에 진출하였고, 2016년 OCI와 합작하여 현대오씨아이를 설립하고 국내 정유사 중 처음으로 카본블랙사업에 진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