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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산업

석유이야기

석유는 언제부터 이렇게 인간 생활 깊숙이 자리잡게 된 것일까? 석유는 오랫동안 ‘역청’으로 불리며 액체, 고체 또는 기체로 바뀌어 사람을 현혹시키는 마법의 물질이었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의 마법사는 석유의 분출과 자유로이 발산하는 가스에 의해 미래를 점치기도 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석유의 성분이 탄화수소라는 것은 밝혀졌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확고한 정설이 없다. 그러나 역사 이전 시대의 상황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서에도 이 불가사의한 물질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모세가 보니 분명히 떨기나무는 불이 붙어 있었으나, 불타고 있는 것은 없었다.”(출애굽기)

석유가 오래 전부터 이용되어온 사실은 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서에 보면 역청이 노아의 방주에 방수용으로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수메르인은 이미 아스팔트를 재료로 조각상을 만들었고, 바빌로니아인도 아스팔트를 건축에 접착제로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미이라를 싸는 천에도 아스팔트를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석유를 상처에 발라 피를 멈추게 하거나 발열을 멈추게 하는 등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석유 용도는 대체로 약용, 도장용, 포장용이나 종교적인 의식에 사용되는데 불과하여, 말하자면 호기심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1) 석유와 문명

석유가 처음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어둠을 밝히기 위한 등화용으로서다. 로마제국, 페르시아, 일본, 인도,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석유를 조명으로 사용한 기록들이 있다. 그러나 채취한 그대로의 광유(鑛油)를 등화에 사용했을 경우 매케한 연기와 냄새를 발산하였으며, 그다지 밝지도 않았다. 석유의 조명용으로서의 특징은 요한 홀크라는 사람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다. 그는 1625년 석유가 갖고 있는 다양한 용도에 대하여 상당히 예언자적인 견해를 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이 기름은(특히 불순물이 제거되고, 증류에 의하여 수분이 분리된다면) 연료용으로서도 우수하다. 그것은 또한 폭죽을 만들고, 대포에 사용할 화약을 제조할 경우에 아마씨 기름 대신에 사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기름은 아마씨 기름보다도 더 격렬하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각자의 의견이 채택되기까지는 2세기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일부 지역에 국한된 석유의 용도는 별도로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아마씨 기름, 올리브유 같은 식물로 어둠을 밝혔으며, 1850년 전후하여 천연 광유로부터 램프유를 얻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어 등유를 제조하기 위한 제유소가 유럽과 미국에 많이 등장하였다. 오늘날 등유를 케로신(Kerosene: 그리스어로 밀납)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당시 역청질의 석탄으로부터 제조한 등유에서 연유한다. 미국에서는 등화용 연료로 18세기 이후 고래기름이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고래기름이 가장 우수한 연료로 사용되었고, 고래가 바다에서 소멸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고래기름 가격이 점차 상승하고, 동•식물유 및 석탄을 건류하여 얻어진 석탄유 등 대체연료는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1859년 미국 펜실바니아주에서 에드윈 드레이크라는 사람이 조명용 램프 연료를 구하기 위해 땅을 굴착하여 석유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석유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유정 굴착자로서 유전 개발을 통한 석유 대량 공급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원유에서 얻어진 등유가 등화용으로 우수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크게 환영을 받아 등유램프의 사용이 19세기 말에 전 세계에 크게 보급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석유정제는 땅속에서 채취한 석유를 증류하여 등유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등유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불태워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잉여제품’, 즉 휘발유와 같이 폭발의 위험성이 있는 것, 또는 중질유분(重質溜分)이라고 부르는 검고 끈적끈적한 제품이 부산물로 생산되었다. 보다 좋은 등유를 얻기 위한 탐구는 석유산업을 탄생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후 만약 석유의 등화 이외의 용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석유산업은 급격히 쇠퇴하였을 것이다. 가볍고 사용하기 쉬운 신에너지원을 찾고 있던 발명가들이 자연히 등유를 만들고 남는 부산물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회전기관용의 증기를 만들기 위하여 석탄을 사용하는 것이 무겁고 거대한 연소장치와 비효율적인 석탄저장소를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석유제품으로부터 직접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에 착안하기 전, 증기를 만들기 위하여 등유를 태우는 여러 가지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가벼운 휘발유가 가진 폭발성에 주목하게 되었으며, 무수한 실패 끝에 최초의 소위 ‘내연기관’이 완성되었다.

1885년에 독일의 다임러는 ‘폭발기관’이라고 부르는 휘발유로 작동하는 내연기관을 완성하여 특허를 신청하였다. 등유로 발동기를 작동케 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등유는 당시 수요가 많아 가격이 비쌀 뿐 아니라 효율성 면에서도 충분하지가 않았다. 발동기 내부에서 공기와 기화 휘발유의 혼합가스를 전기불꽃으로 연소시켜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더욱이 폭발이 2행정 또는 4행정 사이클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이 휘발유 기관은 그 후 석유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기계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치 없고 귀찮은 부산물로 간주되던 휘발유는 불과 수년 사이에 원유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석유제품이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루돌프 디젤은 중질유의 분사작용에 의한 디젤엔진의 특허를 신청하였다. 이와 같이 각종 용도의 석유제품이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기계의 개발이 촉진되었으며, 이에 따라 자동차•항공기•선박과 같은 거대한 산업이 탄생되었다.

한편 석탄자원이 빈약한 나라에서는 석탄 대신에 등유의 부산물인 중유라고 하는 공짜와 다름없는 연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또한 비중과 끓는점에 따라 등유 바로 다음에 얻어지는 경유를 도시가스의 증열용(增熱用)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 기름을 오늘날에도 ‘가스오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소련은 석탄이 희소하여 가격이 비싼 반면, 중유의 입수는 용이했기 때문에 1870년에 카스피해를 항해하는 선박에 중유 보일러를 채용하였다. 따라서 소련함대는 영국 등 주요 강대국 해군보다 약 25년이나 앞서서 신연료인 중유를 사용하였다.

1903년 헨리 포드가 포드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라이트 형제가 12마력의 휘발유 엔진에 프로펠러를 장치한 글라이더로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휘발유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자동차는 아직 스포츠맨 등 특수층의 값비싼 완구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도로가 불완전한 상태였고, 자동차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자동차가 유럽의 생활환경 속에 파고 들어간 것은 1910년에서 1912년경이었다. 이 무렵인 1912년에는 원유에 열을 가하여 끓는점에 따라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를 차례로 생산해내는 최초의 현대식 정유공장이 미국에 세워짐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석유제품 공급이 가능해졌다. 비록 석유산업이 램프용 기름을 공급하기 위해 출발하였다고는 하지만, 자동차 연료로서의 수요가 출현함으로써 그 성장의 계기를 가져왔다. 1920년대 후반 이후 정유공장에서 생산되는 연료의 40% 이상이 휘발유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산업계에 대규모적이고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20세기의 전쟁에서 석유의 역할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자동차•선박•비행기가 전략적 병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 목적상 필요에 의하여 연료의 발견을 가져오기도 하였는데 제트유가 전형적인 예이다. 제트엔진의 등장은 프로펠러 비행기의 퇴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비행기 연료로서 등유가 우세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제트엔진은 효율에 있어서 피스톤엔진의 60%에 불과했지만 무게가 1/4밖에 안 되었다. 이는 보다 빠르고 보다 높이 날 수 있는 비행기의 출현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팬을 통하여 흡입된 공기를 압축하여 연소실로 보내 연료를 분사•연소하여 고온•고압가스로 만들어 터빈을 돌린 후, 추진 노즐로부터 대기 중에 분사하여 추진력을 얻도록 고안된 것이 제트엔진이다. 영국인 엔지니어 휘틀은 1932년에 터보엔진에 대한 특허를 획득하였고, 1937년 등유를 연료로 한 터보제트엔진의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다.

한편 기계의 발달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윤활유와 그리이스(grease)의 진화였다. 즉 석유에서 얻을 수 있는 윤활유와 그리이스는 기계에 있어서 연료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발동기 연료를 합성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떠한 동•식물성의 그리이스도 현대의 기계가 요구하는 광물성 윤활유의 품질에는 결코 따라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석유화학의 탄생

석유의 마법적•신비적인 성질은 정제라고 불리는 근대 연금술에 의하여 증류탑 속에서 조금씩 해명되어 왔다. 근대 정제법이 발명된 것은 1920년 이후의 일이며, 따라서 석유화학이 본격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1933~1935년 이후의 일이다.

화학자들은 석유 속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이질(異質)의 화합물, 즉 염분, 유황분, 가스, 희유금속성분, 기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을 분리•식별하는데 집중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의 성분을 발견함에 따라, 그 물질들을 나프텐, 벤젠, 올레핀, 파라핀…이라고 명명하여 나갔다. 어느 석유제품을 구성하고 있는 탄화수소의 분자구조를 발전시키면 벤젠, 이소펜탄, 폴리에티렌… 등과 같이 복잡한 이름이 나오게 된다. 석유는 탄소원자와 수소원자로 결합된 복잡한 화학구조를 갖고 있는데 분자 등의 원자의 수와 위치를 바꾸기만 해도 어느 화합물에서 다른 화합물로, 또한 수 천 가지의 새로운 화합물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 분자구조를 여러 가지로 변화시켜 석유로부터 수많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압력의 변화 및 촉매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근대 정유공장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복잡한 일련의 방법, 즉 분해증류법, 접촉개질법, 중합법, 알킬화법, 수소첨가법 등에 의하여 탄화수소 분자를 변화시켜 통상 어떠한 제품으로부터나 구하려고 하는 다른 제품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석유화학은 근대 정제법이 발명된 1920년 이후 시작되어 1933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석유회사들은 석유로부터 화학제품을 제조하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물질로부터 제조되고 있었으나, 석유에서 가장 값싼 원료를 추출하는 것과 합성제품을 제조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1930년대에 ‘나일론 섬유’와 합성고무가 발견되었다. 1933년에 네오프렌(합성고무 : 전선피복, 구두 밑창 등에 쓰임), 1935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내구성이 좋은 합성고무의 원료인 부나N(타이어에 쓰임)이 발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수년간은 석유화학의 발명 또는 응용이 계속 이루어져 “세계는 석유로 장식되었다”라는 슬로건이 실감나는 시대였다. 레이온 또는 인견이라고 부르는 직물을 제조하기 위한 아세톤이 1936년 이후 대량 생산되었다. 나일론은 1940년에 듀폰사가 스타킹으로 처음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글리콜(용제와 부동액의 원료)과 합성글리세린이 발명되었으며, 더욱 많은 제품 특히 화학비료가 2차 대전이 끝날 때쯤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

전후 석유계의 원료로 만들어진 화학제품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대량으로 공급되어 전 세계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세제, 플라스틱, 합성고무, 화학비료, 살충제, 합성섬유(나일론, 데크론)는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다. 땅속에서 채취되어 정유공장에서 기화 또는 응고된 액체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강철과 같은 강도를 갖고 있는 차체, 가구용 도료, 화장품, 의약품, 비료, 의류, 신발 등으로 무한하게 변화하고 있다.